영웅과 이름 없는 자 사이
숫자 2,200과 300. 이 두 숫자를 나란히 놓고 나는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북한에서 자라며 '영웅'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TV에서. 그 말은 언제나 누군가를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말이었다. 같은 전투에서 죽었어도, 같은 임무를 수행했어도, 누구는 영웅이 되고 누구는 그냥 '전사자'가 됐다. 그 경계가 어디에서 오는지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배웠으니까.
이번에 한 유학생이 전해온 새별거리 위훈관 이야기를 들으며, 그 오래된 감각이 다시 떠올랐다. 전사자 2,200명 가운데 300명만 '영웅'으로 위훈관 주변에 따로 안치되고, 나머지 1,900명은 건물 안에 함께 안치됐다고 한다. 같은 전쟁, 같은 죽음인 데도 국가는 그들을 다르게 줄 세운 것이다.
이 장면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북한 사회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과 정확히 같기 때문이다. 산 사람도 마찬가지다. 같은 학교를 나와도, 같은 군복무를 마쳐도, 누구는 당원이 되고 누구는 되지 못한다. 누구는 평양에 남고 누구는 지방으로 밀려난다. 죽음마저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번 소식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을 뿐이다.
더 마음에 걸리는 대목은 따로 있다. 자폭으로 숨진 이들이 많았다는 전언과, 살아 돌아온 이들은 군관이 되거나 대학에 진학했다는 전언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셈법은 명확하다. 죽은 자는 영웅의 서사로 소비하고, 산 자는 다음 세대의 간부로 재편한다. 전쟁 하나가 국가에게는 인적자원을 정리할 기회가 된 셈이다. 위훈관에 새겨진 이름들과, 그 맞은편에 새로 지어졌다는 유가족의 집은 이 셈법의 양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슬픔을 위로하는 동시에, 그 슬픔을 다시 국가에 대한 헌신으로 되돌려 받는 구조다.
참관객들이 위훈관을 돌아보며 모두 울었다고 한다. 나는 그 눈물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형이고 동창이었을 사람들의 이름 앞에서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 눈물이 향하는 자리와, 그 눈물을 자아내도록 설계된 자리가 같은 곳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편지와 결의문을 전시하고 전투를 상세히 설명하는 구성은, 슬픔을 애도로 끝내지 않고 다음 세대의 결의로 이어 붙이려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숫자 2,200은 이미 외신을 통해 알려진 숫자다. 그러나 그 숫자 안에서 누가 영웅이 되고 누가 이름 없이 묻히는지를 가르는 기준은, 여전히 국가만이 쥐고 있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죽음까지 등급을 매기는 이 셈법이 다음에는 누구를 향할 것인가?